탈북민·여성국극·입양·결혼제도까지…한국 사회의 경계를 비추는 작품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퀴어 서사를 조명해온 런던 퀴어 이스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와 한국 관련 작품들이 잇따라 소개된다.

퀴어 이스트 영화제는 5월 1일부터 6월 6일까지 영국 런던 일대 극장과 문화공간에서 열린다. 올해로 7회를 맞은 이 영화제는 LGBTQ+ 영화와 라이브 아트, 무빙 이미지 작업을 함께 소개하는 복합 예술 축제로, 동아시아·동남아시아와 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삶을 중심에 둔다. 영화제 측은 올해 프로그램이 “오늘날 퀴어이자 아시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고 밝혔다.

2026 퀴어 이스트 영화제 프로그램에는 한국 장편영화와 다큐멘터리, 단편영화가 함께 포함됐다. 이 작품들은 성소수자 정체성만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탈북, 해외입양, 여성국극, 결혼제도, 사회적 시선과 같은 한국 사회의 여러 층위를 퀴어한 관점으로 비춘다.

올해 영화제는 대만 영화 ‘아웃사이더스(The Outsiders, 孽子)’의 4K 복원판 영국 프리미어로 막을 올렸다. 위칸핑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바이셴융의 소설 ‘Crystal Boys’를 영화화한 첫 작품으로, 가족에게서 밀려난 청소년이 타이베이의 크루징 장소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비칸센터는 이 작품을 4K로 복원된 판본이라고 소개하며,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했다.

가장 눈에 띄는 한국 작품은 박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3670’이다. 2025년 제작된 이 영화는 서울에 막 도착한 탈북 청년 철준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철준은 가까운 탈북민 친구들이 있음에도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숨긴 채 고립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용기를 내 술자리 모임에 나가고, 영준을 만나 서울의 클럽과 바를 중심으로 형성된 게이 커뮤니티에 들어서게 된다.

영화제 측은 조유현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을 “한국 퀴어 영화의 이정표”로 소개했다. 제목 ‘3670’은 종로3가역 6번 출구, 오후 7시를 뜻하는 만남의 암호에서 따왔다. 작품은 북한이탈주민 청년이 서울의 게이 커뮤니티를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탈북과 정체성, 도시의 퀴어 공간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김혜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도 상영작에 이름을 올렸다. 2011년 제작된 이 작품은 1950년대 한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의 역사를 다룬다. 여성국극은 여성 배우들이 남성 역할까지 맡아 공연한 음악극으로, 당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눌렸던 해방적 여성성을 드러낸 문화 현상이기도 했다. 영화는 노년이 된 여성국극 배우들의 기억과 공연, 동료애를 따라가며 젠더 수행과 남성성, 위장의 문제를 살핀다.

단편 프로그램에서도 한국 작품들이 포착된다. 류한솔 감독의 ‘버진로드’는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선 존재가 자기 자신과 결혼식을 올리는 실험적 단편이다. 몸이 갈라지고 장기가 흘러내리는 이미지와 결혼식이라는 제도적 의례가 결합되며, 결혼을 정상성과 가족제도의 상징이 아닌 낯설고 불안정한 장면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이 작품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결혼과 재생산에 부여되는 압박을 다루는 프로그램 ‘Let’s Get Married!’ 안에서 상영됐다.

박서연 감독의 ‘진실 혹은 물고기’는 한국에서 성공을 꿈꾸는 젊은 레즈비언 뮤지션 안젤라를 주인공으로 한다. 공연 중 반성소수자 반발을 마주한 안젤라는 사회의 주변부에 숨어 사는 퀴어 물고기들에게 이성애를 수행하는 법을 배운다. 영화제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통해 이성애 규범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연기되는 것일 수 있음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김세진 감독의 ‘콜록, 콜록, 컬러!’는 수줍음 많은 소미가 소개팅에 나가기 위해 용기를 내는 순간을 그린다. 머릿속을 휘감는 불안 때문에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일조차 버거워지는 상황을 포착하며, 퀴어한 만남 앞에서 개인이 겪는 긴장과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다룬다. 이 작품은 음식과 기억, 퀴어한 각성, 욕망을 연결하는 단편 프로그램 ‘Closed Mouths Don’t Get Fed’에서 상영됐다.

한국 단독 제작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와 깊게 연결된 다큐멘터리도 있다. 조타 문 감독의 ‘Between Goodbyes’는 네덜란드에서 자란 퀴어 한국 입양인 미케와 한국에 사는 친모 옥균의 관계를 따라간다. 옥균은 1982년 인구 과잉 우려와 경제적 어려움, 남아 선호라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 딸을 입양 보내야 했다. 영화는 재회 6년 뒤 미케가 아내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옥균과 가족에게 자신의 결혼을 알리는 과정을 담으며, 해외입양의 역사적 유산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 밖에도 마카오 출신 영화감독의 성장과 과거의 경험을 다룬 ‘걸프렌즈(Girlfriends)’, 정치적이면서도 캠프한 감각을 지닌 태국 영화 ‘어 유즈풀 고스트(A Useful Ghost)’ 등이 상영된다. 영화제는 장편과 단편, 다큐멘터리, 공연, 무빙 이미지 작업을 통해 아시아 퀴어 문화의 다양한 층위를 소개한다.

퀴어 이스트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성소수자 정체성만이 아니다. 이 영화제는 아시아라는 지역성, 이주와 디아스포라, 가족과 공동체, 사회적 억압과 자기 발견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퀴어 서사를 서구 중심의 문화 담론에 가두지 않고, 아시아 각 지역의 역사와 언어, 정치적 현실 속에서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퀴어 이스트 영화제의 한국 관련 프로그램은 한국 퀴어 영화의 관심사가 점점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성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탈북민의 이동과 도시의 퀴어 공간, 여성국극의 젠더 수행, 해외입양과 가족, 결혼제도와 정상성의 문제까지 함께 다룬다. 퀴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사회의 경계와 균열을 다시 읽는 작품들이 국제 영화제의 무대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퀴어 이스트 영화제의 확장은 최근 세계 영화계에서 퀴어 시네마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퀴어 영화가 주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날의 퀴어 시네마는 인종, 이주, 계급, 국가, 언어의 문제까지 함께 묻는다. 특히 런던이라는 다문화 도시에서 열리는 퀴어 이스트는 아시아 퀴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하고, 관객들이 그 삶의 복잡성을 마주하는 장이 되고 있다.

런던의 스크린 위에 놓인 이 작품들은 한국 퀴어 서사가 더 이상 국내적 맥락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와 문화, 제도 속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아시아와 디아스포라 관객 앞에서 새로운 질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퀴어 이스트 영화제는 그 질문들이 만나는 자리이자, 한국 퀴어 영화가 세계 관객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