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가 아닌 폭력”…성소수자 정체성 바꾸려는 관행에 제동
유럽연합이 성소수자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바꾸려는 이른바 ‘전환치료’ 금지 논의에 나섰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5월 13일 전환치료 금지를 요구한 유럽시민청원에 대한 공식 답변에서, 2027년 회원국들에 전환치료 금지를 촉구하는 비구속적 권고안을 채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전환치료 금지를 요구한 시민청원이 10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데 따른 것이다. 청원은 LGBTQ+ 시민을 대상으로 한 전환치료를 유럽연합 차원에서 금지하고, 피해자 보호와 지원 기준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전환치료는 동성애나 양성애, 트랜스젠더 정체성 등을 ‘고쳐야 할 문제’로 보고 개인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 성별표현을 바꾸거나 억압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공개한 시민청원 검토 문서도 전환치료를 LGBTQ+ 개인의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또는 성별표현을 변화·억압·억제하려는 개입으로 설명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전환치료와 같은 관행은 “우리 연합에 설 자리가 없다”고 밝혔다. 하자 라비브 평등 담당 집행위원도 전환치료를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바꾸려는 해롭고 근거 없는 관행으로 규정했다.
다만 이번 조치는 유럽연합 전체에 즉각 적용되는 구속력 있는 금지법은 아니다. 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에 전환치료 금지를 촉구하는 권고안을 내는 방식으로 대응할 예정이다. 시민청원이 요구한 유럽연합 차원의 전면적이고 구속력 있는 금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전환치료를 개인의 선택이나 종교적 신념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국제적 흐름을 보여준다. 전환치료는 종종 상담, 교육, 종교, 의료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그 전제에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잘못됐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개인의 결함으로 간주하고 이를 교정하려 할 때, 당사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럽연합 기본권청이 2024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LGBTQ+ 시민 4명 중 1명은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AP통신은 특히 그리스, 키프로스, 체코, 에스토니아, 슬로바키아 등에서 관련 경험 보고가 높았다고 전했다.
현재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가운데 전환치료를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금지한 국가는 일부에 그친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27개국 중 10개국만이 전환치료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몰타는 201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환치료를 금지한 국가로 꼽히며, 프랑스는 형사처벌 조항을 포함한 법률을 마련했다.
유럽의 논의는 한국 사회에도 질문을 던진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고쳐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법률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의 압박, 종교 공동체의 상담, 학교와 직장의 침묵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전환치료 금지 논의의 핵심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 살아갈 권리를 사회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있다.
유럽연합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성소수자의 삶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전환치료 금지를 둘러싼 논의는 이제 단순한 해외 인권 이슈를 넘어,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존엄을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