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 '영극'. 안윤 작가의 소설 『모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시각장애가 있는 영은과 콜센터 상담원 미란, 그리고 그들 곁의 선주와 보현이 각자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상실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리허설을 마치고 본공연을 앞둔 어느 날, 류이향 연출과 네 명의 배우가 프리즘타임스와 마주 앉았다. 선주 역의 박윤선, 영은 역의 장인혜, 미란 역의 김수아, 보현 역의 변신영. 본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그들이, 각자가 채우고 있는 자기만의 방(room)과, 그들이 함께 짓고 있는 한 방에 대해 이야기했다.

 

1. 어떻게 만났나, 작품과 사람

Q1. '영극'이라는 단어를 직접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존의 연극·영화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류이향 (연출) 사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사업을 비롯해 여러 지원 사업에 작품을 넣으면서 시작된 단어예요. 지원 사업에서는 타이틀이 중요하거든요. 한 번에 무엇을 하려는지 보여줘야 하는데, "연극과 영화를 섞는다"라고 풀어 쓰면 너무 기니까 그냥 '영극이라는 장르를 내가 만들겠다'라는 포부로 단어 하나를 만들어봤어요. 시어터 시네마라는 용어는 외국에 있긴 한데, 한국에서 '영극'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요.

저는 열아홉 살 때 극단에 들어와서 연극을 쭉 해왔어요. 그러다 코로나가 닥치고 여러 일이 겹치면서 번아웃이 왔고, 그 시기에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작품을 했어요.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원작이 소설이었거든요. 소설은 누군가의 눈빛이 어떻고 손길이 이마를 만지는데 그게 어떻고, 그렇게 자세하게 묘사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무대 위로 올리려고 하니까 한계가 너무 분명한 거예요.

그래서 잠시 중단하고 뮤직비디오랑 인디 영화 쪽에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영화는 -물론 영화만의 매력이 정말 있지만- 영화라는 작업 특성상 씬을 끊어서 촬영하잖아요, 시간 순서대로 작업하지 않고, 배우와 스태프가 대부분의 경우 구분되어 있고요. 적어도 제가 작업하는 연극에서는 배우들과 격 없이 막 얘기하는 게 익숙했거든요.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그 즉흥적인 폭발력 같은 게 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결국 둘 다 애매하게 할 바에는 두 개를 섞어보자. 그게 시작이었어요. 〈모린〉은 특히 디테일한 요소들이 중요한 이야기라서, 더 맞는다고 생각했고요.

Q2. 어떤 장면을 연극으로 가고, 어떤 장면을 영화로 갈지는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류이향 작년 워크숍 때 배우들과 정말 많이 토론했어요. 단순히 말하면, 연극으로 표현했을 때 더 좋은 장면과 영상으로 표현했을 때 더 좋은 장면을 골라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미란이 영은을 쳐다보는 눈빛이 보여야 한다고 하면, 그게 연극에서 보였을 때 알맞은 씬이 있고 영화에서 보였을 때 알맞은 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무대에서는 나뭇잎이 흔들리고 거기에 햇빛이 반짝거리는 걸 무대에서도 보여줄 수도 있지만, 영상으로 보여줬을 때 훨씬 강력하다고 여겨지면 그쪽으로 가는 거고요. 작년에 워크숍 보러 오셨던 분들이 다시 보시면 없던 장면이 생기고 있던 장면이 빠지기도 해서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거예요.

Q3. 미란 캐스팅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굉장히 오래 찾으셨다고요.

류이향 캐스팅 과정에서 정말 많은 미란을 봤어요. 이 미란이가, 저 미란이가… 정말 도대체 어떤 미란을 골라야 하나 하면서 찾고 또 찾았어요. "이거 큰일 났네" 싶은 정도까지 갔어요. 그러다 보현 배우가 (현재 미란 배우를) 추천을 해주셨는데, 워낙 저희 프로덕션이 작으니까 흔쾌히 해주실까 걱정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처음 미팅을 딱 했는데, 제가 그때 마스크를 쓰고 있었거든요. 마스크 안으로 웃음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그랬는데, 언니들이 옆에서 계속 봤대요.

변신영 (보현 역) 연출님 가시고 우리끼리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들 "너무 좋은데? 표정을 못 감추던데?" 그랬어요.

류이향 미란의 시선과 미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 건 결국 그 주인공한테 내가 와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도 저랬지", "정말 저래, 사랑할 때, 누군가를 밀어낼 때"라는 공감이 생겨야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연출로서 배우를 구하는 과정이 저한테는 가장 중요해요. 다른 연출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그러니까 미란이 정해져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대체 언제 구할 수 있지 싶어서 너무 답답하던 차에 이제 풀리는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던 것 같아요.

 

2. 작품이 다루는 세계

Q4. 〈모린〉에는 여성, 퀴어, 시각장애, 감정노동자, 노년, 자폐 스펙트럼 아이의 가족까지 여러 정체성이 교차합니다. 이게 '나열'로만 소비되지 않기 위해 지키신 원칙이 있을까요?

류이향 사실 저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을 받아들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원 사업에 어필한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어쨌든 지원 사업에서는 냉정하게 이 이야기가 뭔지 설명해야 하니까 그런 걸 적었지만요.

예를 들어 영은이 자기소개할 때 "안녕하세요, 저는 시각장애인이고 퀴어예요, 저는 여자를 좋아하고요"라고 소개하지 않잖아요. 그냥 "저는 영은입니다"라고 하죠. 영은은 그런 사람이고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삶을 선택했을 뿐인데,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영은은 뜨개질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거고요. 우리가 자기소개할 때 보통 그런 타이틀을 달고 소개하지 않잖아요. 외부 관찰자의 시점에서 볼 때는 그게 강력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그 사람의 인생에서는 너무 당연한 거라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소수자성의 교차가 있는 이야기를 사랑하지만, 〈모린〉이 깊게 다가왔던 건 그냥 이 사람들이 그냥 '삶'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이 인물들이 사랑하고 교류하는 방식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살짝의 거리를 두면서 사랑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통해 배려하는, 전 여친이랑 애매한 관계인, 그런 흥미로운 사람들이 그저 서로를 보는데, 그중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일 뿐이고, 한 사람은 상담원 일을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자폐 스펙트럼 아이의 가족이 있을 뿐인 거예요. 결국 접근하는 방식은 그냥 사람으로서, 그냥 삶으로서 접근하는 거예요.

Q5. 영은 배우께 여쭙고 싶어요. 시선과 표정을 덜어내는 연기를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장인혜 (영은 역) 평소에 배우는 눈에 의지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눈으로 감정을 담아내고 상대 배역과 호흡할 때 눈을 많이 쓰는데, 일단 그 많은 감각 중 눈이 안 보인다는 게 큰 결을 가지니까 다른 감각들을 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케인(지팡이)에도 감각이 있고, 촉각에 집중하려고 했고요.

사실 이 부분이 어려운 지점이에요. 보이는데 안 보이게 하려고 하는 게 제가 계속 찾아가는 과제입니다. 저는 당사자분들을 흉내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가장 근본적으로 보이는 것에 있어서 눈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그게 가장 큰 과제였어요. 영상이면 끊어가니까 눈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데, 무대에서는 한 시간 넘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흉내내지 않고, 내가 집중할 수 있게 다른 곳을 보자고 방향을 잡았어요.

그런 방향은 작년 워크숍 때부터 많이 찾으려고 했어요. '어둠 속의 대화' 전시에도 작년에 갔다가 올해 다시 다녀왔는데 느낌이 좀 다르더라고요. 청각에 더 집중해보는 활동들에 시간을 쓰고, 시각장애인분들과 함께하는 자원봉사도 가서 더 가까이서 뵙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제가 팔꿈치를 내어드렸을 때 어떤 느낌인지, 그분들이 저랑 이야기하다 신이 나면 이렇게 힘을 주면서 빨리 걸으시거든요. 리듬감을 주면서요. 그런 느낌들이 저한테도 고스란히 전해지니까, 시각장애인분들의 내면에 다가가려고 노력했어요. 다큐도 많이 보고, 유튜브도 많이 보고요. 어떤 걸 흉내내기보다는 그냥 감각을 열고 내면에 닿자, 그게 지금의 방향이에요.

Q6. 보러 오는 분들의 접근성도 많이 신경 쓰셨다고요.

류이향 너무 다행인 게, 작년 워크숍은 협소한 연습실 공간에서 했기 때문에 계단도 있고 현실적으로 베리어 프리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작년에 〈납골당 드라이브〉를 연출할 때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었는데, 다리 다친 지인이 보러 오셨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극장을 오르락 내리락 하셨을지, 정말 죄송하다.”고 이야기 했었거든요. 이렇기에 시각장애인 작품이 아니어도 접근성은 잘 갖춰야 한다고 늘 생각해요. 모두가 예술에 접근할 최소한의 권리는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극장 대관 사업이 돼서, 너무 다행히도 역에서 2분 거리에 있는 1층 극장이에요. 화장실도 턱이 없고 들어가는 데도 턱이 아예 없어서 휠체어도 다 들어가실 수 있어요. 안내도 잘 되어 있고요. 우리가 현실적인 이유로 많은 접근성을 갖추지 못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보러 오실 수는 있겠다 싶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후각적 요소도 원래는 더 어필하려고 했는데, 안내견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고 사람에 따라 후각 자극이 공연 내내 있으면 머리가 아픈 경우도 있어서 잔잔하게 들어가도록 조정하려 합니다.

Q7. 미란 배우께 여쭙고 싶어요. 〈모린〉이라는 이야기를 한 줄로 표현한다면요?

김수아 (미란 역) 저는 이 작품이 관계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관계 맺는 모든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잖아요. 저로 치면 저와 저의 애인, 저의 가족, 저의 친구, 저의 동료, 저의 제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요. 이 작품에도 미란의 할머니, 직장 동료들, 화내는 손님, 친구, 사랑하는 연인, 연인의 친구, 정말 많은 가지가 있어요. 이 수많은 관계가 총집합해 있고, 그 안에서 각자가 어떤 상실감들을 갖고 있어요. 그걸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하고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는 작품이에요.

 

3. 함께 짓는 우리의 방

Q8. 지금까지 연습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있다면요?

장인혜 며칠 전이요. 영은이 긴 독백을 하는 씬을 여러 번 해보다가, 미란이 홀로 있을 때ㄴ 듣고 있을 때 제가 다가가서 손을 잡고 데리고 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보현 배우의 눈물이 터졌어요. 이렇게 쌓이고 쌓여 있는 미란에게 다가가는 그 느낌이, 같은 배우가 공감해주는 그 느낌이 저한테도 다가와서 저도 갑자기 눈물이 나왔어요.

변신영 예고되지 않고 했던 장면 연습이었거든요. "이렇게 한번 해볼까?" 하면서 한 장면이었는데, 미란이 회피하고 어떤 굴 속으로 파고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근데 그걸 영은이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두 손을 잡고 내려오는 느낌이었어요. 진짜 나를 이렇게 꺼내주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박윤선 (선주 역) 저는 영화 촬영할 때였어요. 미란 배우님과 강애심 배우님(미란의 할머니인 복순 역)이 저희 집에서 촬영을 했거든요. 저는 옆에서 보조를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두 분이 껴안는 장면이 있었어요. 여러 번 찍으니까 계속 보긴 하지만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저희 할머니한테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른 리허설 장면도 인상 깊은 게 많았는데, 그때가 특히 크게 남아요.

김수아 강애심 선배님은 처음 만나보는 선배님이셨거든요. 긴장도 많이 됐는데, 눈이 엄청 크셔서 진짜 그 사람 자체가 너무 따뜻한 거예요. 그래서 긴장도가 확 낮아졌어요. 여러 배우들을 만나는데, 상대와 연기할 때 저렇게 편안하게 해주실 수 있는 그 사람의 힘이 있어요. 에너지요. 눈에서 정말 많이 나와요. 그래서 윤선 배우가 자기 할머니가 생각났다고 한 그 정도로요. 빨려들어가게 하는 눈을 가진 배우셨어요.

류이향 저는 매일매일이 인상 깊고 스펙타클하고 정말 예상치 못한 것들이 가득해서 한 장면만 고르기는 어려워요.

Q9. 미란 배우께서는 무대와 영상, 두 매체에서 다 호흡하셨잖아요. 영상으로 호흡하는 건 어떠셨어요?

김수아 연기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무대에서는 시간성이 꼭 존재하잖아요. 관객 앞에서, 이 공간에서. 그래서 이 시공간을 다 생각해야 하고, 공간성을 가지고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거든요. 반대로 영상 촬영을 할 때는 거의 모든 걸 진짜로 세팅을 해놓으니까, 시공간을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상대한테 집중을 하게 돼요. 그래서 미묘하고 섬세한 액션과 리액션이 왔다 갔다 해요. 클로즈업을 하면 이 사람의 섬세한 숨소리도 보게 되고, 표정과 눈빛에서 읽어낼 것들이 엄청 많아요. 무대 문법에서는 제가 뭔가를 표현하고 드러내줘야 할 때가 있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연극 작업만큼 영화 작업을 좋아해요. 미묘하고 복잡한 심경들을 연기해볼 수 있는 재미가 있어서요.

Q10. 김수아 배우께서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방"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김수아 캐릭터의 방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연극은 그 방을 저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비교적 영화는 지극히 혼자 만들지만(물론 감독과 제일 많이 얘기는 하지만요), 연극에서는 신영이도, 인혜도, 윤선이도, 모두의 방이 궁금해야 해요. 저희는 사적인 얘기들도 많이 나누거든요. 배우 각자가 살아온 방식이 너무 달라서 생각도 너무 다른데, 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을 해야 해요. 함께 책 속, 대본 속의 세계를 공유하는 인물들로 만드는 일을 저희가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 미란의 방은 개별적이지 않고, 이 인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 안의 저만의 방이 되어야 해요.

근데 이게 제일 흥미로우면서도 제일 힘든 부분이에요. 의견이 너무 다르니까 다 맞춰야 하고, 이 사람 것도 이해해야 하고 저 사람 것도 이해해야 해요. 잠이 안 올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 날도 있어요. 그래도 이 작업에 어떤 발견이, 더 넓은 세계가 분명히 있어서 계속 해오는 것 같아요. 아직 3주 넘게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더 많은 게 발견되고 쌓일 거예요.

Q11. 한 작품을 만든다는 게 결국 함께 있는 시간이잖아요. 함께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다면요?

박윤선 저는 연습할 때 잘 안 풀리고 방향을 모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언니들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한번 해보면 좋겠다"라고 얘기해주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진짜 힘이 돼요. 계속 공연을 하고 연기를 해오는데,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뭘 했지, 연기를 이렇게 하는 게 맞나"를 매번 겪으면서 불안해져요. 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경력도 쌓이는데 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럴 때,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겨요. 그게 동료로서 많이 힘이 돼요. 사실 그렇게 말해주는 게 쉽지 않거든요. 특히 언니들이 동생들한테 얘기할 때는 더 마음을 쓰고 단어도 고르고 신경 써서 말해준다는 걸 제가 아니까, 그게 고마워요. 제가 막내거든요.

장인혜 연극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매일매일 함께한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있어요. 영상 작업을 할 때 오늘 촬영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태프가 돼서 작업을 도와줘요. 제가 스태프가 됐을 때는 촬영하는 사람을 보면서 조언도 하고 응원도 하면서 마음이 가고, 제가 촬영할 때는 옆에서 다른 배우들이 도와줄 때 그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니까 더 가까워져요.

김수아 집에서 가족보다 더 많이 봐요.

류이향 물리적으로 함께하고 있어요. (웃음)

박윤선 그리고 촬영할 때마다 언니들이 맛있는 거 사주고 반찬 해 오고요.

변신영 저는 술자리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미란 배우, 수아 언니가 했던 그 "방" 얘기, 세계를 함께 공유하는 방을 만들어가는 시간 같다는 얘기. 그래서 내 배역, 내 인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이 관계를 만드는 게 진짜 중요한 작업이거든요. 작품을 만들 때, 공연이 끝나고 얘랑 내가 진짜 친구로 보였는지 이런 걸 생각해요. 비단 내가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케미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진짜 친구가 되는 부분이 연극을 만드는 데 진짜 중요한 지점이에요. 그런데 이번 준비 안에서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연습도 해야 하고 촬영도 해야 하고, 촬영은 또 미술까지 같이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저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술자리를 꼭 가지려고 해요. 그냥 술자리가 함께한다는 게 아니라, 술자리에서 얘기하다 보면… 처음 술자리는 진짜 어색했거든요. "언니는 뭐 뭐 하세요?" 막 이러면서 뜬구름 잡는 질문도 하고요. 근데 어제 중요한 리허설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모였어요. 그랬더니 극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는데 우리가 진짜 가까워졌구나 싶더라고요. 한 장면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그 장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인물이 느끼는 지점, 밖에서 볼 때는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 정말 세세하게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 작품을 같이 가고 있구나 싶어요.

김수아 저는 극단의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몇 번 없어요.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프리랜서의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이번에 여기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새로웠던 것이, 양보와 배려가 이 팀에서 정말 많이 느껴졌어요. 자기 씬이 아니어도 누가 서포터가 되어서 스태프 일을 한단 말이에요. 저는 이런 걸 처음 봤어요. 일반적으로 저는 제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우선시 여겼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자기의 일이 아니어도 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본인들이 나서서 해요. 그런 것들 덕분에 집에 와서 제가 조금씩 생각을 바꾸게 되었어요. 이런 사소한 것들이 '함께한다'고 생각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감각 때문에 제가 이 친구들에게 자꾸 놀자고 해요. 제가 놀고 싶으니까 노는 거고, 술자리든 뭐든 꼬셔서 노는 건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고 그 사람을 알고 싶기 때문이잖아요. 마음에 안 들면 뭐 하러 묻겠어요. 이걸 놀고 싶게끔 만들어주는 힘이 이 친구들에게 있어요. 저는 작년 워크숍을 같이 안 했는데도 이렇게 마음이 맞아져서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게 된 가까워짐이, 무대 위에서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 신뢰감의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그 힘이 저한테는 고마운 일이에요.

 

4. 작년과 올해, 그리고 사랑과 상실

Q12. 작년 워크숍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요?

류이향 저는 솔직히 작품과 거의 2년 동안 연애 한 것 같아요. 안윤 작가님의 모린이란 소설을 발견하고 얼마 안 되어 작업에 들어간 시점부터 지금 지원서 쓴 기간까지 합치면요. 물론 인혜 언니(영은 역)가 저보다 소설을 더 많이 읽었어요. 그 사이에 시각장애인 인플루언서·유튜버분들과도 더 긴밀히 접촉해서 영상을 굉장히 많이 보고, 그쪽의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가게 됐어요. 그래서 밀도와 이해도 자체가 작년 워크숍보다 훨씬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물리적으로 들인 시간이 너무 많아져서 작년에 보셨던 분들도 다시 보시면 훨씬 더 밀도가 높아졌다고 느끼실 거예요. 소설을 한층 디테일하게 반영하려고 했고, 극장도 훨씬 좋아졌고요.

변신영 인물적으로는 수아 언니가 미란 역할로 들어오면서부터 달라진 게 있어요. 작년의 미란을 만났을 때와 수아 언니가 하는 미란을 만났을 때가 분명히 다르거든요. 친분이나 그런 걸 떠나서 케미가 달라지니까, 미란과 영은의 케미도 달라지고, 미란과 보현이 만나는 장면의 느낌도 달라지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장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느껴요.

저 개인적으로는, 작년 워크숍은 작은 연습실에서 워낙 잔잔한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제 역할의 서사를 길게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아 미란 중심으로 가져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미란의 성장에 조금 더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보현이라는 인물을 맡은 배우로서, 보현을 층층이 다르게 가져가려는 생각을 좀 접었거든요. 1인 다역으로 다른 역할도 했고요. 올해 작품은 미란의 시점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라는 것은 같지만, 미란 한 개인의 성장이라기보다는 이 관계와 각자의 어떤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들에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현을 좀 더 심층적으로 시도해보고 있어요. 아직 만들어 가는 과정이지만요.

박윤선 저는 작년 워크숍에는 모든 게 영은으로만 이룩된 어떤 선주를 만났던 것 같아요. 사귀고 10년을 연애하고, 헤어지고 나서도 10년을 이 사람 옆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연기할 때도 이 인물은 영은에게 어떤 감정의 잔여물이 남았을까, 그런 식으로 영은과 관련된 모든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올해 이 작업을 통해 선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왜 헤어지고 나서 10년 동안 옆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함께해주느냐에 대한 질문 해봤을 때, 연애 감정이 아니라 이건 연대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느끼기엔 선주도 소수자고, 영은도 소수자고, 그러니까 어떤 마음으로 영은을 대했을까를 생각했어요. 서로 지켜주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거다, 그 마음을 가져가려고 했어요. 여성들끼리 더 관계 맺고, 지지해주고, 지켜주고, 안전하게. 그런 마음들이 좀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장인혜 이번 작업은 거의 4월과 5월에 리딩과 촬영이 함께 있었어요. 그래서 무대 위에서 호흡하고 맞추고 영은을 준비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했어요. 그래서 영은을 만나는 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작년의 영은을 거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연기에 나오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미란에게 집중해서 거기서 오는 나의 감정들을 더 발견해보자, 거기에서 오는 충분함을 더 찾아보자. 그게 올해 저의 과제예요.

Q13.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흘려보내세요?

김수아 저는 (이별하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작품이 끝나면 외로움이라는 단어도 적합하지 않고, 고독은 너무 센 것 같고, 그 중간 정도의 어떤 비워진 듯한 총체적인 아쉬움이 밀려와요. 그걸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일상을 건강하게 사는 일들로 회복해야 해요.

저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오는 루틴이 있어서, 한 작업에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주에서 3주 정도면 회복하는 데 충분해요. 건강하게 이별하는 일을 연습하고 있어요. 혼자만 있는 시간이요. 함께 작업 했던, 보고 싶은 친구들한테 연락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이 작업의 세계를 좀 털어내야 해요. 그런 뒤에 다시 함께했던 동료들을 보고 싶으면 한 번씩 만나는데, 그게 또 주는 힘이 있어요. 그때 또 만나서 하는 수다의 깊이가 또 다르거든요.

변신영 저는 사실 이별에 좀 취약한 사람이에요. 연인과의 이별도, 실제로 만나지 않더라도 회복되는 시간이 진짜 오래 걸려요. 배우일과 병행해서 가끔씩 아이를 돌보는 알바를 하는데, 4개월 정도 매일 보던 아이가 있었어요. 마지막 날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한 시간을 울었어요. 그렇게 이별에 좀 취약해요. 그래서 작품 끝나고 쫑파티에서 밤새 놀잖아요. 파티가 끝나고 우리 집에서 한두 시쯤 눈이 떠졌을 때, 그 허함이 있어요. 눈 떴으니 연습실 가야 할 것 같고, 동료들 봐야 할 것 같고요.

어렸을 때는 그런 순간들이 정말 힘들어서 계속 같이 했던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불러서 술을 마셨어요. 너무 허전하니까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건강한 방법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술 먹고 돌아왔을 때 또 허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수아 언니처럼 저만의 뭔가, 수영을 매일 간다거나 여행을 한 번 다녀온다거나, 그런 다른 걸로 시간을 건강하게 채우려고 해요. 그러면 또 괜찮아지더라고요.

장인혜 너무 몰입하다 보면 내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고, 그러면서도 그 생각이 계속 찾아오잖아요. 그냥 떨치려고 하지 않고, "그래 지금 영은이 왔구나" 이러고 있다가, 또 괜찮아졌다가. 이 정도 됐다 싶으면 정리되는 것 같아요.

박윤선 저는 무대가 하루 이틀이면 세워지고 마지막 공연 날에 다 없어지잖아요. 그게 허무하다는 감상을 늘 받아요. 술도 많이 안 먹는데 막공날에는 술을 먹고, 다음 날 눈을 뜨면 "다 끝났다"는 허탈함이 찾아와요. 그러면 다음에 뭐 하지, 막 떠올리고요. 그러면서 뭘 했고 어땠고, 잘 된 것 같고 안 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했고, 이런 걸 다 기록해요. 또 친한 친구들을 만나면 "어땠어, 얘기해봐" 하면서 분석해요. 그런데 그게 잘 되는 인물이 있고 잘 안 되는 인물이 있어요. 스스로 더 마음이 가면 그렇게 더 친구들에게 물어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저 나름의 분석의 시간을 좀 보내요.

근데 어느 순간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게 어떤 회피의 마음 같기도 해요. 앞에 쌓였던 감정들을 빨리 잊어버리고 다른 걸 하려고, 슬픔과 공허함을 뭐라도 다른 우선순위로 채운 다음에 빨리 그것을 하자, 그런 마음이요. 그래서 요즘에는 그냥 계속 글로 남기는 걸 많이 해요. 마음이 어땠고,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니까 "이런 것 같다, 이런 것 같다" 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이요.

Q14. 〈해가 지는 곳으로〉, 〈납골당 드라이브〉, 〈모린〉, 이렇게 세 작품을 연속으로 하셨어요. 류이향이라는 연출가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요?

류이향 저는 공감되지 않으면, 끌리지 않으면 못 하는 사람이에요. 학창시절부터 어떤 것에 깊이 꽂히지 않으면 도무지 손이 안 가서, 성적도 과목별로 극단적으로 갈리는 사람이었거든요. 연출도 마찬가지예요. 어쨌든 제 뼈와 살과 피를 다 갈아서 해야 하니까, 이 이야기에 정말 내가 그만큼 팬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쓰든 누군가의 이야기든, 정말 내 삶이 녹아져 있어야 그릴 수 있어요.

관통하는 키워드는 소수자성이 있는 이야기에 끌린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에 끌린다는 거예요. 남성들의 이야기에 안 끌린다는 게 아니라, 남성들 이야기는 제가 할 짬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정도까지 넓은 시야를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일단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좀 더 깊게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지금은 여성들의 이야기,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삶, 그들의 관계, 그들이 겪는 상실에 끌려요. 〈해가 지는 곳으로〉도 아포칼립스가 터지고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되게 자그마한, 사람과 삶에 대한 것이거든요. 〈납골당 드라이브〉도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결국 담고 있는 건 소수자들이 겪는 상실, 청년들이 겪는 사회적인 부분들, 죽음을 맞닥뜨리는 문제들이었고요. 〈모린〉도 죽음에 대한 요소가 나오고, 상실과 삶과 관계, 이런 것들이 계속 저한테 걸려요.

저는 사람을 참 좋아해요. 이제는 밸런스를 조절하려고 노력 하는데, 여태까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깊게 상처받고 너무 길게 아팠어요.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조정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늘 흥미로워요. 이 세상에 나 자신만 존재하면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내가 윤선 언니를 만나면, 인혜 언니를 만나면, 신영 언니를 만나면, 수아 언니를 만나면. 거기서 나오는 관계성이 생길 때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극이라는 것도, 이 작업 과정 자체가 관계 맺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관계의 사람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이 너무 달라져요. 그래서 지금 과정에서도 그 관계 맺기를 중시하고 있고, 실제로 배우들끼리도 인물들끼리도, 그 관계 맺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5. 마무리

Q15. 마지막으로, 〈모린〉을 보러 와야 할 단 하나의 이유를 꼽는다면요?

박윤선 연극과 영화를 만나볼 수 있는 '하이브리드 영극'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두 가지 맛을 다 느낄 수 있다는 게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메리트라고 생각해요. 영화도 만 오천 원, 만 육천 원이 넘어가는 시대에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을 영화와 연극으로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점이요.

변신영 저번에 술자리에서 "누가 지인이 네 작업을 물어보면 한 줄로 뭐라고 할 거야"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윤선 배우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이야기인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 와닿았어요. 미란과 영은의 사랑 얘기만이 아니라 이 네 명의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가기도 하고 각자의 삶을 어떻게 이어가는지, 서로 지켜주고 바라봐주는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분들이 "그래, 그냥 사는 건 똑같구나" 그런 걸 좀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위로를 받고, "다 저렇게 사는 거지" 하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자기 삶을 보고 "다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자기 시간을 열심히 보내고 있구나, 그 나이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라는 걸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김수아 여러 종류의 삶에서 여러 종류의 상실감들을 계속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극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영은이라는 커다란 무너짐이 있었던 인물이 미란에게 그 사람의 방식으로 어떤 이해와 배려와 위로를,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영은이라는 인물의 행동들 때문에 마지막에 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어요. 내가 감히 떠올리지도 못한 위로의 방식, 나를 이해하는 방식. 그 방식을 공연을 보면서 가져가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살아가는 작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영은이란 인물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걸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에, 더 크게 작동되는 것 같아요.

변신영 언니 얘기를 듣다 보니 느낀 건데, 이 네 인물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각자가 본인만의 어떤 상실을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물 안에서 영은은 시각을 잃었고, 미란은 할머니를 잃었고, 보현도 어떤 삶을 잃었고, 선주도 10년을 함께한 어떤 삶이 있었던. 그런 각자의 상실감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공감과 사유가 관객분들한테 있었으면 좋겠어요.

류이향 관객분들이 보면서 자신만의 상실을 떠올릴 수 있으면 너무 베스트일 것 같아요. 나만의 상실, 각자의 상실이 다 있으니까요.

김수아 대본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게, 똑같은 일을 경험하지 않고도 이렇게 링크가 돼요. 관계들 속에서 내가 전에 만났던 누구, 혹은 나에게 그렇게 대했던 선생님, 그런 것들이 다 떠오르게 돼요. 그래서 마지막에 '위로받음'이라는 단어가 조금 납작할 수 있지만 각자에게 울림이 있었던 이유는, 독자와 관객들에게 연결되는 순간들이 각자 많아서인 것 같아요.

류이향 영은이 작품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사람들이 자기한테 "쟤 시각장애인이다, 눈도 못 보는 애다" 같은 얘기를 했을 때, 또 퀴어로서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하나하나 다 원망하고 분노했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요. 다 각자의 슬픔이 있어서 가끔은 누군가에 서 있고 가끔은 누군가를 공격하고 자신을 공격하고 밀어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고요. 인간은 입체적이잖아요. 항상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요. 사실 미란은 보현한테 어떻게 보면 못된 짓을 하는 거고, 영은도 선주한테 못된 짓을 한 걸 수도 있어요. 그렇게 오래 함께해온 연인을 하루아침에 끊어낼 수 있는지.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사람한테는 모든 것을 다 배려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한테는 다 이해해주고, 어떤 사람을 감히 혐오하는 순간도 있고. 그게 사람이고,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누구한테 벌컥 화내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요. 안윤 작가님의 이야기 속에 그게 너무 녹아 있어서, 저는 이 사람들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이구나, 그냥 지어진 인물들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그래서 관객분들이 연인이나, 가족이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오시면 더 많은 걸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