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자발적으로 커밍아웃한 현직 국회의원. "Don't Ask, Don't Tell" 폐지와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을 이끈 인물. 그리고 말년까지 자기 운동의 방향을 고쳐 쓰려 한, 끝내 단순하지 않은 사람.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GBH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짧은 질문을 받았다. "인생에서 한 가지를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30년 넘게 미국 의회에서 LGBTQ 권리 운동의 가장 앞자리에 섰던 사람의 대답은 단 한 문장이었다.
"더 일찍 커밍아웃했어야 했다."
미국 동부 시간 5월 19일 밤, 메인주 오건키트의 자택. 30년 넘게 매사추세츠를 대표한 전 연방하원의원 바니 프랭크(Barney Frank)가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울혈성 심부전으로 호스피스 케어를 받던 중이었다.
1987년의 결정
그가 미국 LGBTQ 정치사에 새긴 자국은 두 개의 "최초"로 압축된다. 1987년, 세계 최초로 자발적으로 커밍아웃한 현직 연방의원.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를 통해서였고, 스캔들에 떠밀린 폭로가 아닌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2012년, 미국 최초로 임기 중 동성 배우자와 결혼한 연방의원. 상대는 짐 레디(James Ready).
커밍아웃 직후 그는 정치인답게 여론조사를 돌렸다. 약 45%의 응답자가 "커밍아웃이 정치적으로 그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래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선거에서 70% 가까운 득표로 재선됐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무게는 정체성에만 있지 않았다. 2007년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위원장에 오른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직후 크리스 도드 상원의원과 함께 도드-프랭크 월스트리트 개혁 및 소비자보호법(Dodd-Frank Act)을 공동 입안했다. 미국 금융규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입법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그는 LGBTQ 군인의 공개 복무를 금지한 "Don't Ask, Don't Tell"의 폐지를 주도한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989년, 그리고 그 이후
부고는 영웅의 자국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1989년, 워싱턴 타임스는 프랭크가 보좌관으로 고용한 남성이 두 사람의 공동 거주지에서 남성 매춘 알선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프랭크는 의회 윤리위원회 조사를 받았고, 1990년 견책(reprimand)을 받았다. 사임은 면했지만 정치 경력에 깊은 흠집이 남았고, 일부 보수 진영은 이 사건을 그의 성정체성에 대한 공격에 활용했다.
프랭크 자신은 이후 인터뷰에서 "이것이 동성애자 정치인의 사생활을 어떻게 정치 무기로 쓸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라고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의 판단 착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 타임스를 20년이 넘도록 외면했다. "내 인생을 망친 신문"이라는 표현으로.
호스피스의 책상
그가 호스피스에서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것은 책 한 권이었다. 예일대 출판부에서 9월 출간 예정인 『The Hard Path to Unity: Why We Must Reform the Left to Rescue Democracy』('단결로 가는 험한 길: 민주주의를 구하려면 좌파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책의 주장은 한국 퀴어 운동의 시야에서 보면 묘하게 불편하다. "호전적 좌파(militant left)"가 일반 유권자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문화 의제를 밀어붙여 왔다는 비판.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도 그는 "민주당이 일부 문화 이슈에서 일반 대중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영역까지 너무 빨리 가고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권리 등 일부 의제에 대한 그의 발언은 LGBTQ 진영 내에서도 논쟁을 불러왔다.
1987년의 그가 가장 앞에 서 있었다면, 2026년의 그는 자기 운동에 제동을 거는 자리에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끝까지 사고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사고가 자기가 열어놓은 운동의 후배들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기고 간 자국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추모 성명에서 그를 "LGBTQ 공동체를 위한 선구적이고 강력한 목소리"라 부르면서, 동시에 "HIV/AIDS와 주거 문제에서의 헌신"을 함께 언급했다. 두 가지를 따로 떼어내지 않은 추모 방식 자체가 그의 결을 보여준다.
선구자였고, 입법가였고, 1989년의 당사자였고, 말년의 비판자였다. 이 모든 것을 한 사람 안에 담은 채로 그는 떠났다. 그가 남긴 도드-프랭크법은 여전히 미국 금융을 규율하고, 그가 폐지에 기여한 "Don't Ask, Don't Tell" 이후의 미군은 다시 트럼프 2기의 압력 아래 흔들리고 있다. 1987년 그가 열어놓은 자리에는 지금 수십 명의 공개 LGBTQ 의원이 앉아 있다.
"더 일찍 커밍아웃했어야 했다."
그가 마지막에 남긴 후회는, 어쩌면 그가 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그다운 한 문장이었다.
